[기업성장史②] 그룹해체 25년에도 세계경영은 이어진다
서종열
seojy78@cwn.kr | 2024-03-15 05:00:00
공격적인 확장전략·세계경영 통해 성장…IMF 겪으며 그룹 해체
[CWN 서종열 기자] "세계를 경영하겠습니다. 대우가 앞에 있습니다."
세기말이란 표현을 쓰던 1999년 대우그룹은 마지막 CF광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21세기를 앞둔 12월 대우그룹은 결국 해체됐다.
1967년 3월 서울 충무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의 작은 무역상으로 출발한 대우그룹은 1999년 재계서열 2위까지 올라섰지만, IMF(외환위기)의 파고를 결국 넘지 못했다. 섬유 전문 무역상으로 출발해 건설, 조선, 중공업, 전자 등 다양한 산업에 진출했지만, 결국 무리한 확장전략이 그룹해체의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세계경영'이란 경영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했던 대우그룹의 위상만큼은 그룹 해체 4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기업들의 모임을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22년 '新기업가정신협의회(ERT)'를 결성하고 과거 창업자들의 마음가짐과 신규 창업자들 지원에 나선 것도 바로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경영이념과 일맥상통하다는 설명이다.
바바리코트와 007서류가방, 그리고 정장과 구두를 통해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녔던 대우그룹의 흥망성쇠를 다시 살펴봤다.
◇ 트리코트 킴, 500만원으로 창업에 나서다
대우그룹 창업자는 故김우중 회장이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경기중·경기고를 졸업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대구사범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전쟁 과정에서 납북 당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연세대 경제학과를 진학하며 주경야독의 시간을 보낸 김 회장은 1960년 한성실업이란 무역업체에 입사하며 무역상으로 데뷔했다. 당시 한성실업은 국내 최초로 '트리코트(메리야스로 짠 직물)'를 수출했는데, 김 회장은 바로 이 업무를 맡게 되면서 동남아 일대로의 수출계약을 잇달아 따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의 별명도 생겼다. 바로 '트리코트 킴'이다. 입사 이후 동남아 일대의 수출계약을 잇달아 따내며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김 회장은 한성실업을 그만두고 1967년 대도섬유 도재환 사장과의 합작으로 자본금 500만원의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사장이면서 회사의 1호 수출사원이 된 김 회장은 곧바로 동남아로 넘어가 트리코트 수출계약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설립 첫해에만 38만달러 규모의 제품을 수출했다. 당시 대형 수출업체들이 연 100만달러 정도를 수출했단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대박을 낸 셈이다.
동남아 일대에서 수출처 확장에 나섰던 김 회장은 1969년 미국 시어즈 로벅과 JC페니 등에도 납품계약을 체결하며 미국에도 진출했다. 특히 창업 5년 만인 1972년에는 수출 5300만달러를 달성하며 국내 최대 섬유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 종합무역상사로 승격…창업 10년 만에 대기업 일궈
60년대 후반 섬유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인 김 회장은 곧바로 회사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1969년 새창직물, 1970년 동남섬유 인수를 시작으로 1972년에는 고려피혁, 1973년에는 쌍미섬유와 신성통상을 인수했다. 본업인 섬유 무역 부문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경쟁력 강화에 나선 것이다.
섬유·무역 부문을 강화한 김 회장은 1973년 본격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섬유공장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기계설비 확보를 위해 동국정밀을 인수했으며, 해외 수출 과정에서의 금융부문 강화를 위해 동양증권도 사들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건설'을 설립했으며 12월에는 동남전기도 인수했다.
무엇보다 대우그룹 역사에서 1973년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룹의 상징처럼 여겨진 대우빌딩을 이해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교통빌딩으로 불렸던 서울역 앞 대우빌딩은 공사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공사가 중단된 상황이었다. 당시 정부는 관광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워커힐호텔·영빈관·교통빌딩을 매각했는데. 이중 워커힐호텔은 SK그룹이, 영빈관은 삼성그룹이 인수했다. 김 회장은 교통빌딩 인수를 위해 당시 대우실업의 기업공개(IPO)를 단행하는 것과 동시에 보유 중이던 삼주빌딩도 매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우그룹은 현재의 대우빌딩에 무사히 입주하게 됐다. 그리고 1975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면서 10개 계열사를 보유한 그룹체제로 변신을 완료했다.
◇ 자동차·기계·조선 등 중공업그룹으로 변신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던 대우그룹은 대우빌딩 입주 이후 대대적인 사업조정에 나서게 된다. 기존 섬유무역에 집중됐던 사업구조를 중공업분야로 확대되면서 중후장대 사업 중심의 대우그룹으로 변신에 나선 것이다.
먼저 대우그룹은 1976년 신진그룹 소유의 한국기계를 인수했다. 정부 소유였던 한국기계는 국내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및 산업기기 생산업체였다. 대우그룹 체제에 합류하게 된 한국기계는 사명을'대우중공업'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제철화학을 인수했으며, 1978년에는 새한자동차도 사들였다. 당초 신진자동차로 출발했던 새한차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 자동차 생산기업이었다. 하지만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의 충격과 함께 1975년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내놓으면서 위기를 겪었다.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던 새한자동차는 결국 대우그룹에 매각되면서 '대우자동차'로 개명했다.
같은 해 10월 대우그룹은 한국조선공사가 소유하고 있던 경남 거제의 옥포조선소도 매입했다. 옥포조선소는 당시 100만톤급 초대형 선박 건조가 가능한 세계 최대 단일 도크를 보유하고 있던 터라 세간의 관심이 높았다. 김 회장은 당시 전체 도크 공사의 25%만 진행됐음에도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며 '대우조선'을 설립했고, 1981년 4월 제1도크를 완성했다.
이렇게 대우그룹은 1967년 창업이후 10여년만에 섬유·기계·금융·건설·자동차·조선·중공업을 아우르는 국내 대표 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 세계 눈 돌린 킴키츠칸, '세계경영'에 나서다
대우그룹의 성장사를 보면 매출을 통해 성장하는 전형적인 수출기업을 닮아있다. 설립초기부터 섬유 수출을 통해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이를 통해 막대한 규모의 달러를 국내에 들여와 기업인수를 통해 성장해온 구조다. 직접 창업하기 보다는 부실기업을 인수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진행해 정상화시킨 후, 영업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키는 공식을 반복하며 성장했다.
70년대 공격적인 확장전략을 통해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대우그룹은 80년대 해외 수출을 통해 매출을 올림과 동시에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삼았다. 창업 이후 단 10년 만에 국내 4대그룹으로 성장했던 만큼 내부단속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꾸준하게 내실을 다져왔던 대우그룹은 1990년대 국내가 아닌 해외로 눈을 돌리며 다시 한 번 공격적인 확장전략을 펼친다. 이른바 '세계경영'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김 회장과 대우그룹은 냉전으로 인해 경쟁기업들이 진출하지 못했던 유럽 내 동구권 국가들과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을 집중 공략했다. 실제 대우자동차는 폴란드와 헝가리, 우즈베키스탄 등에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공격적인 확장에 나섰다.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 동구권까지 공격적으로 진출하다보니 재계에서는 김 회장을 '킴키즈칸'으로 부르기도 했다. 징키스칸의 몽골제국 진격로와 대우그룹의 해외 성장 루트가 유사한 것은 물론, 공격적인 확장전략을 펼치는 것도 비슷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 외환위기 태풍으로 결국 무너져
국내를 넘어 해외로 영토를 넓혀가던 대우그룹은 그러나 1990년 후반 아시아 금유위기를 겪으며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남아를 시작으로 우리나라까지 번졌던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 정부가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스탠다드 기준의 회계기준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당시 대우그룹의 상황은 그야말로 내우외환 이였다. 대우자동차와 대우전자 등이 매출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기술부족이 배경으로 지목됐다. 삼성과 LG, 현대 등이 각각 주력사업부문에서 꾸준하게 기술개발 및 투자를 이어왔던 것과 달리 대우그룹은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90년대 중반 대우그룹은 연구소를 만들고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나섰지만,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결국 그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차익경영으로 인한 부채였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1997년 30대그룹의 부채총합은 무려 350조원에 달할 정도였다. 기업별 기준으로는 평균 부채비율이 무려 518%였다. 대우그룹은 이중에서도 부채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그룹 전체 부채만 89조원에 달한 것. 당시 정부 예산이 84조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우그룹의 부채 규모가 엄청났다는 점을 반증한다.
그룹 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김 회장이 펼친 '대마불사' 전략도 위기를 키웠다. 과거 석유파동 당시 대출을 더 늘리며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김 회장은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회계조작을 통해 부채를 숨기고 대출을 늘리는 것을 선택했다.
실제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당시 금융권으로부터 대규모 대출지원을 받아 워크아웃상황이던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를 인수했고, 당시 쌍용차의 자산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일본계 금융사인 노무라증권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등장하면서 대우그룹의 위기가 본격화됐다. 금융권의 대출 회수가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결국 김 회장은 대우그룹의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줄이는 대규모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고, 다음해인 1999년 4월에는 대우차를 제외한 전 계열사 매각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인해 다른 대기업들도 공중분해가 잇따르고 있던 터라 대우그룹에 투자를 하겠다는 투자자들은 없었다. 결국 12개 계열사의 어음부도가 발생하면서 워크아웃이 시작됐고, 1999년 12월 그룹 임원단이 전체 사퇴를 결정하면서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 이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세계경영 DNA
30여년의 기간 동안 탄생부터 몰락까지 불꽃처럼 타올랐던 대우그룹은 그룹 해체 후에도 재계의 관심을 받았다. 그룹 내 주력계열사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던 만큼 다른 대기업들이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이 대표적이다. 대우건설은 2000년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무역상사였던 ㈜대우의 건설부문이 인적분할돼 설립됐다.
2002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대우건설은 2006년부터 도급순위 1위를 3년 연속 달성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이 2006년 6월 치열한 경쟁 끝에 6조6000억원에 들여 대우건설을 인수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자금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했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10년 결국 대우건설을 산업은행에 다시 매각했다. 이후 대우건설은 10년에 걸쳐 산업은행 체제로 운영되다 2021년 중흥건설에 인수됐다.
㈜대우에서 건설부문을 떼어 낸 상사 부문은 이후 포스코그룹에 인수돼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며 출범한 대우중공업은 2000년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대우조선(현 한화오션)·대우종합기계(HD현대인프라코어)·대우중공업(청산법인)으로 분할됐다.
2001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대우조선은 2008년 매각이 진행되다 금융위기로 인해 무산됐다. 이후 2022년 10월 한화그룹이 인수에 나서면서 현재의 한화오션이 됐다.
이밖에 대우증권은 미래에셋금융그룹에 인수됐으며, 대우전자는 동부그룹을 거쳐 위니아그룹에 매각됐다.
김 전 회장이 마지막까지 애착을 가졌던 대우차는 그룹 해체 이후 합작파트너였던 제너럴모터스(GM)가 출자를 통해 인수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우그룹은 '글로벌경영'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국내 기업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세계경영'을 통해 글로벌 경영에 나섰던 기업"이라며 "외환위기로 인해 여러 기업들이 무너졌지만, 대우그룹이 구조조정을 통해 생존했다면 지금의 재계순위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CWN 서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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