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80년, 남북의 대립은 여전히 한반도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진 현실 속에서도 스포츠만큼은 언제나 장벽을 넘어선 '공통의 언어'였습니다. 정치적 대화가 멈추더라도, 경기장만은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최근 파주시는 DMZ 국제 평화마라톤 대북 접촉 승인을 받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마라톤이 긴 호흡으로 끝까지 함께 달려야 하는 상징이라면, 저는 평화를 향한 또 다른 종목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바로 필드하키입니다.
북한은 필드하키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전략 종목으로 육성해 왔습니다. 특히 여자 하키는 국제 대회에서 북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상징적 종목이었습니다. 1980년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 여자하키팀은 아시아 최강을 다투었고, 각종 국제 대회에서도 꾸준히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북한 체육 관계자들은 필드하키를 "단결과 협동을 기르는 대표적 단체 구기 종목"이라 평가해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와 화합의 가치와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남북은 여러 차례 스포츠를 통해 평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전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같은 해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단일팀이 꾸려졌습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만들어져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했습니다.
스포츠는 정치가 멈춰 설 때마다 돌파구가 되어왔습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스포츠는 늘 남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왔습니다.
필드하키 역시 남북 교류의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남북 스포츠 회담에서 필드하키 교류가 논의된 바 있으며, 아시아하키연맹 대회에서도 남북 선수단이 만난 전례가 있습니다. 비록 아직 단일팀이나 공동경기까지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필드하키는 남북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종목입니다.
필드하키는 11명의 선수가 끊임없이 소통하며 움직여야만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공격과 수비가 완전히 하나로 움직여야 하며, 팀워크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남북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평화의 과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스포츠가 평화에 기여한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는 냉전의 철벽을 허물고 두 강대국 간 역사적 화해의 물꼬를 텄습니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 월드컵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7년 파키스탄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이 크리켓 경기 관람을 위해 인도를 깜짝 방문한 '크리켓 외교'는 카슈미르 분쟁으로 극도로 악화된 양국 관계를 완화시켰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란과 미국 축구팀의 경기는 단절된 두 나라 사이에 대화의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 중인 도시국가들이 휴전을 선언하는 '신성한 휴전'이 지켜졌습니다. 이처럼 스포츠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의 언어였습니다.
이제는 구호를 넘어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DMZ 평화마라톤이 평화의 출발선이라면, 필드하키 교류전은 그 여정을 이어가는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남북체육발전협의회는 남북 필드하키 교류를 위해 모든 준비를 다하겠습니다. 정부와 관련 기관, 체육단체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실질적인 교류 방안을 모색하고, 국제하키연맹 등 국제기구의 지원도 적극 요청할 계획입니다.
하키 스틱이 분단의 철조망을 넘어 평화의 다리를 놓는 그날, 우리는 스포츠가 한반도에 진정한 봄을 가져올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는 그날까지, 스포츠가 앞장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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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의장
현) 남북체육발전협의회 의장
현) 서울시 하키협회 대표
현)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
전) 서울시 12대, 13대 하키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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