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호 칼럼] 과학의 속성, 과학적 실천과 과학 공동체

신명호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소장

| 2026-04-23 14:01:03

파이어아벤트(Paul Karl Feyerabend)가 모든 과학이 따라야 하는 표준이 되는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초월적인 과학의 방법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등과 같은 과학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리스 시대, 중세시대, 근대, 현대의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자 개인이 주관적인 소망에 따라 어떻게 해도 좋다는 식으로 결론이 내려질 수는 없다. 표준적 방법이 아니면 방법의 부재라는 양극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필요는 없다.

차머스(Alan Francis Chalmers)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에는 여러 방법과 여러 기준이 존재한다.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을 통해, 성공적인 과학들이 특정한 시기에 우연히 등장했으며 역시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방법들과 기준들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과학 지식을 생산하고 과학기술노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 표준이라는 환상보다는 다양한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난 다양한 과학의 특징에 대한 공통성과 차이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적 실천의 집합체로서 과학은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보편적이고 일반적 방법과 체계,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과학과 과학의 방법이 보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주장은 몰역사적인 관념적 과학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역사를 통해 출현한 각각의 개별 과학들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과학과 과학의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각 분과별로 다양한 방법과 기준들이 있으며, 그 방법들과 기준들은 한 과학에서 다른 과학으로 가면 변할 수도 있고, 한 분과 안에서도 변할 수 있다. 성공적인 과학과 그 과학의 방법과 기준들은 어떤 필연성 없이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정립된 것이다. 과학을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표준적 절차를 통해 수행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 이데올로기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유해하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물리적⸱역사적 조건들을 무시하게 할 뿐 아니라 과학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조적인 종교”와 같은 것으로 만든다. 

또한, 과학의 이론과 법칙들은 서로 통약불가능할 수 있다. 이론과 법칙은 초월적으로 참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참이다. 이론 법칙은 실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상화된 실재의 모형에 대한 것이며, 현상 법칙은 실험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기술하는 법칙이다. 보편적이고 광역적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수준에서 이론의 참과 거짓 문제를 논의할 수 있으며, 일정한 제약 속에서 이론적 존재자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과 법칙의 국소화와 더불어 실재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점점 더 밝혀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은 실재론적이다. 그 과정에서 표상은 대치되거나 전도될 수 있으나 수학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세련화되어 간다. 그러므로 인식론적으로 과학을 ‘비표상적 실재론’ 혹은 ‘구조적 실재론’으로 명명할 수 있다. 

루만(Niklas Luhmann)의 시스템 이론에 의하면, 사회는 비서열적이고 수평적인 기능으로 구분되는 정치, 경제, 종교, 과학, 법, 교육 등과 같은 여러 개의 하위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하위 시스템들은 다른 하위 시스템들이 포함된 환경으로부터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자기준거적이고 자기생산적인 열린 시스템이다. 각각의 하위 시스템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하위 시스템이 이해할 수도 없고 번역할 수도 없는 자체의 ‘언어’와 의미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하위 시스템들 사이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상위의 공통 언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하위 시스템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입력에 반응하여 자체적인 언어로 다시 번역하며, 그 자극과 입력에 대해 내적인 논리나 의미 체계를 통해 반응하고 적응한다. 이는 여러 하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전체 사회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방법도 다양한 하위 시스템들을 의도적인 행동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방법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과학이라는 개념과 기존의 과학 공동체라는 개념은, 전자가 커뮤니케이션 체계이고 후자가 행위자들의 집합체라는 의미에서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과학 공동체가 과학 지식으로 구성된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최근의 시스템 이론에서 추가적인 분석 단위로 각종 사회조직, 공공기구, 집합체 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 공동체 자체를 과학이라는 개념을 대신하는 하위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은 생산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직접 생산에 투입되는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기능을 생산과 재생산으로 나누는 마르크스의 구분을 적용하여 본다면 재생산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재생산 영역에 속하는 과학과 기술은 생산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때 과학지식을 생산하는 행위자들의 집합을 과학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 공동체의 내적 논리와 의미체계, 동적 메커니즘, 모 사회와의 구조적 결합이나 상호작용 등은 모두 이러한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규정된다. 글래서(Jochen Gläser)를 따라 과학 공동체를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해결해야할 문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문제 해결 결과를 누구에게 어떻게 제공해야할 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행위자 집합체” 

이제 우리는 과학적 실천과 그 실천의 주체들을 통해서 과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은 물리적⸱기술적 문제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적을 위해 과학적 실천을 수행하는 분야별 과학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의 핵심 범주는 문제이며, 과학적 실천의 주체는 과학 공동체이다. 

과학 공동체는 분과 학문별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구성원들은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 (학문과 지식의 총체)를 참조한다. 각 개인은 규범이 아니라 자기인식, 즉 스스로가 과학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함에 의해서 구성원이 되며, 몇 개의 분과 학문별 과학 공동체에 동시에 소속될 수도 있다.

과학 공동체는 비공식적이고 유동적이며 기술하기 어려운 사회적 집합체로 강하게 분산되어 있으며,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면서 문제해결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은 과학 지식의 생산에서 자주 직면하게 되는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탁월하게 작동한다. 지식 생산은, 많은 경우 다음과 같은 정보들이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문제해결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① (정의)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문제는 어떻게 공식화되어야 하는가? 

② (해결가능성) 현 단계의 지식 수준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있는가? 

③ (해결 방법) 그 문제는 어떻게 풀려질 수 있는가? 

④ (지식의 유효성과 신뢰성) 어떤 지식이 유효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문제 해결에 적용될 수 있는가? 

⑤ (해결 주체)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과학 공동체처럼 분산적이고 자율적인 접근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접근법을 적용할 때,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문제를 공식화하고 해결하기 위한 독립적인 시도들이 동시에 가능한 많이 시작될 수 있다. 

이 중 많은 시도들이 실패하거나 중복된다 하더라도, 분산적인 접근법은 가능한 빨리 문제를 해결할 확률을 높인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 방법을 공식화 할 줄 아는 행위자가, 스스로 일을 선택하고 수행하므로 해결해야할 문제와 행위자의 최적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이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신속한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 공동체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온 방법이며, 지식과 사회적 환경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며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발달시켜 온 방식이다. 

그런데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에는 조직적인 거버넌스의 부재라는 단점이 있다. 과학 공동체에는 집합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구조나 과정이 없을뿐더러, 많은 구성원들을 조정해서 주어진 시간 내에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과학 공동체가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식적인 방향성을 갖는 활동이라기보다는 ‘표류 (drift)'하는 것과 같다. 과학 공동체는 내부적인 의사결정, 소통, 협업 등을 조직하기 위해 전문가 조직, 저널, 학회, 제도화된 동료평가 절차 등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 역시 자율적이고 국지적 차원에서 작동하므로, 전체 구성원들을 구속하여 특정한 형태의 집합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과학 공동체와 근대 사회는 특정한 형태의 구조적 결합과 상호작용을 발전시켰다. 과학 공동체는 지식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므로 사회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회는 과학 공동체가 지적⸱물질적 복리에 기여하기 때문에 자원을 제공한다.

사회와 과학 공동체 간의 사회적 계약이 바로 과학 공동체의 존재론적 필수 조건이자 근거가 된다. 그런데 과학 공동체는 비공식적이고 유동적인 집합체이므로, 사회로부터 지원을 유지하고 공공복리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수용하고 관리하는 사회와 과학 공동체 간의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이 인터페이스는 크게 과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대학을 포함한 연구조직과, 펀딩 에이전시와 같이 자원 배분을 담당하기도 하고 연구와 연구 정책에 대한 의사 결정을 담당하기도 하는 매개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에 대한 사회적 기대, 연구를 위해 제공되는 자원, 연구를 통한 공공복리에의 기여 등은 이러한 조직과 그 조직을 지배하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조직과 제도를 통칭하여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 한다. 

사회와 과학 공동체는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구조적으로 결합하고, 필요 자원과 지적⸱물질적 복리를 교환하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과학 공동체와 사회와의 구조적 결합과 상호작용으로서의 각국의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은 역사성과 특수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국가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 연방정부의 R&D 예산이 국가 R&D 총예산의 66.8% (1964년)였던 때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의 국가 R&D 총예산 중 정부 R&D 예산이 20~30%, 기업과 민간이 70~80%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과학지식 생산에 있어서 총자본과 개별자본들의 현재 역할 분담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과학의 본질, 과학적 실천과 주체, 과학 공동체와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는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 총체적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지 않고서는 과학기술을 자신의 권력과 이윤을 위해 사용하고 민중을 착취하고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자들과 대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의 수치들로부터 간단한 질문들을 할 수 있다. 

개별자본이 민중에 필요한 과학 지식을 자본을 투여해 개발할 리 만무하고, 그렇다면 총자본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는 민중에 필요한 과학 지식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는 것일까, 과연 생산하기는 할까? 과학 지식의 보편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민중들이 필요로 하는 과학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일까? 민중이 필요한 과학 지식을 스스로 생산해낼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술파시즘의 위협을 분쇄하고, 과학기술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자본주의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인류의 자멸이라는 파국을 막아내고, 자본과 전쟁의 핵심 도구가 되어버린 과학을 ‘인간조건의 생태적 기초와 근원적 탐구 행위로서의 과학’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민중이 과학기술을 온전하게 전유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신명호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소장


한국과학기술원 학사, 석사, 박사


現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


現 기계공학회 신뢰성부문 이사


前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정책위원장


前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과학기술특별위원회 위원장


前 해병대 마린온 추락사고 민관군 합동조사위원회 민간위원


[ⓒ CWN(CHANGE WITH NEWS).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